[윤종훈의 히스토요리] 야쿠르트 한 개, 그리고 봉오동의 후손들
[윤종훈의 히스토요리] 야쿠르트 한 개, 그리고 봉오동의 후손들
  • 윤종훈 작가
  • 승인 2019.08.22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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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국 야쿠르트
사진=한국 야쿠르트

 

야쿠르트와 요구르트는 얼핏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전자의 이름을 가진 것은 탈지분유에 당분을 섞어 만든 같은 중량의 물보다 싼 ‘저렴한’ 음료다. 요구르트는 고유명사이면서 건강식을 연상하게 하는 역사를 가진 음식이다. 한 회사의 상표이기도 한 야쿠르트는 그래도 오랜 기간 동안 서민들의 시간을 채워왔다. 기사식당에서 노동자의 식사가 끝난 후 카운터에서 주인이 쥐어주는 한 개, 아파트 복도 데면데면한 옆집 할아버지 부탁을 받아 그다지 무겁지 않은 물건을 잠시 들어주고 나서 주름가득한 손으로 건네주시는 그 한 병은 거절할 수 없는 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야쿠르트를 접했던 많은 이들이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기억. 아빠. 또는 할머니가 빨대 꼽아서 주면 그 얼굴 올려다보며 빨대를 입에 물던 기억이다. 싸구려 탈지분유가 아니라 피내림의 사랑이다.

조수연(가명) 할머님은 요즘 손주에게 면구스럽지 않다. 손주가 건네는 한마디 덕분이다.

“할머니 , 요즘은 할머니가 매일 야쿠르트를 사줘서 너무 좋아요. 하루에 한 개씩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어린 손주가 말하는 행복이라는 단어. 그 두음절의 단어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손주가 웃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피끌림. 그것으로 손주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손주가 사는 나라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은 할머님의 탓이라고 자책한다.

할머님의 형편이 나아진 것은 얼마 전에 신청한 ‘기초생활수급자’ 급여 혜택이 해당되면서 매달 손에 60만원의 돈이 주어지게 되면서 부터였다.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말에 이곳저곳 발품을 팔았다. 과정을 물어보면 늘 같은 문제가 생겼다. 내 나라라고 하는데 평생을 써온 말이 아니다보니 말이 어려웠다. 부족한 어휘는 손짓 발짓으로 채웠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자신의 뿌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고 한국행을 택했다.

대한민국은 말로 전해듣던 것 이상으로 화려한 곳 이였다. 조수연 할머님은 외할아버지 이름 세 글자를 들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입성과 먹성’을 챙길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낯선 곳에서 금박 입힌 잠자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먹성은 소반이면 족했다. 그러나 이후 마주친 낯선 광경들은 기대했던 것과 거리가 있었다. 나랏일을 맡아보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아직 귀국하지 못한 아들이 중국에 남아있었다. 아들을 데려와야 하니 대한민국에 물어 양해를 구해야 했다. 책상 앞에 앉은 이가 여러 장의 종이를 되짚어 한 줄 한 줄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한다. “어르신 , 아드님이 국적 회복을 신청하시면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에서 어르신이 누락되실 수가 있어요.”

책상에 앉은 공무원선생이 건네어준 종이를 바로 읽을 수 없자, 다시 한국말로 설명해준다.

○ 부양의무자 기준

-부양의무자 범위 : 수급권자의 1촌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배우자가 사망한 사위·며느리·계부·계모는 수급권자의 부양의무자가 아님)

-부양의무자 적용 기준

· 부양의무자가 없는 경우

·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는 경우

· 부양의무자가 부양능력이 미약한 경우로서 수급권자에 대한 부양비 지원을 전제로 부양능력이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

· 부양능력 있는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을 받을 수 없는 경우

아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이 되어야 했으니 ‘내가 수당신청을 하면 안되겠구나’ 라고 생각한 조수연 할머님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님은 ‘기초생활생계급여’ 수령이 가능한 상황 이였다. (이후 몇 년간 급여 신청을 하지 못하시다가 유족회 사무국의 도움으로 심사를 받았다. 그리고 급여 60여만 원을 수령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감사한 일이였다. 손주에게 변변하게 간식 하나 사주지 못해서 입이 마를까 노심초사하던 할머님의 마음속 작은 응어리가 풀렸다. 손주의 미소 덕분이다. 야쿠르트 한 개로 미소를 얻었다. 야쿠르트 한 개의 가격은 100원이다.

사진=영화 '봉오동 전투'
사진=영화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 ( 기록... 일부)

간민회의 한인 자치와 ‘독립전쟁론’ 구현의 전통을 계승하여 결성된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항일 단체로 부상하면서 군무위원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군이 편성됐다. 이를 홍범도의 주장에 따라 대한독립군과 일단 통합했다. (중략) 또한 이와 같이 성립된 정일제일군은 곧 이어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와의 군사 통일도 추진됐다. (중략).... 1920년 6월 7일 일제의 ‘월강추격대’ 라고 하는 침략군은 그날 새벽 3시 30분 해란강이 두만강과 합류하는 온성 하탄동 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 진군하러 왔다.

그러나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이를 예측하고 포위망을 쳐놓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봉오동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키고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 배치하여 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망타진하려 한 작전이였다....(중략)....첨병을 보냈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한 일본군은 전위부대를 선두로 봉오동 하구에 진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명록가(崔明錄家)를 비롯한 온 마을을 마음대로 토색하면서 미처 피난치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였다.(최명록:최진동) 이후 ‘월강추격대’는 독립군이 매복하여 있는 포위망 깊숙이 진입해오게 된다. 홍범도 사령관은 일제 공격을 개시한다. 추격대는 가미야중대와 나카니시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필사항전 했으나 사상자만 속출했다. (참고 :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일보)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나라 잃고 조선 땅을 떠나온 백성들은 필부의 몸으로 바람같이 일어서서 목숨을 걸었다. ‘감자’ 하나로 다름과 같음을 이야기 하던 그들의 이야기는 과장됨 없이도 충분히 영웅의 서사시로 기록될 수 있다. 싸웠던 이들이 원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공훈 첩 한 줄에 남는 기록, 전쟁의 승리로 취할 수 있었던 금전적 이익, 이런 것들은 분명히 아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우리,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나라, 그 땅을 위함 이였다.

독립군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아있는 봉오동 전투. 건조하게 남아있는 기록에서도 혁혁한 공훈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충심에 화답하기 위해 후손들은 기록에 남아있는 후손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함이 마땅한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함이 아닌 이타적 행동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찾아내고 있는 공적의 기록들은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사료의 부족, 공정한 서훈, 정치적인 대립 등의 이유가 있다. 목적이 보이는 역사적 가르기. 선과 악을 규정 지을 수 없는 이분법적 판단 등으로 기록은 잊혀져간다 독립군의 손자 최XX 현재 중증 치매로 거동이 어렵다. 부인 이봉숙 선생이 돌보고 있으나 이분은 조선족도 아닌 한족으로 의사소통이 용이치 않다. 봉오동 전투 지휘관의 후손 최정선‧최금자 두 자매는 현재 인천에 거주 중이며 기초 생활 수급자로 등록되어 급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조국은 ‘봉오동 전투’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정권의 교체 수차례, 진화인지 퇴보인지 모르는 시간은 답답하게 흘러왔다. 노무현 정권에서 처음 시작한 듯한 과거사 청산위의활동, 반민족행위자 재산몰수 등 이미 정리가 끝났어야 하는 기본적 활동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시작도 못하던 일들. 그나마 그렇게 시작된 국가적 시도 역시 반 정도,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 하면 반의 반도 안 되는 이의제기만 하고 말게 된 결과들. 때로는 남이섬 , 때로는 인천의 땅 같은 뉴스거리로 나타나 안부를 전해주는 친일 후손들. 어쩌면 우리가 재정립 하려고 하는 역사. 역사라는 단어에 대한 정답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과거를 정리하고 지금을 거쳐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오래된 화석 그것들 중 화려해 보이는 호박(송진에 아로 잡힌 곤충 및 동물의 사체)을 먼저 꺼내어 나열한다. 호박 안에 거품이나 곤충의 배설물이 있으면 그것은 무늬로 명명지어야 했다. 우리의 역사 만들기의 모습이다. 나열된 모양새는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커다란 그림맞추기 퍼즐판 , 건곤감리와 태극으로 구성된 선명한 판이다. 열심히 맞추려고 애를 써보지만 지나가다 흔들고 , 퍼즐조각 들고 가서 감추고, 여러 군상들이 여러 해를 방해하면서 지난하게 이어왔다.

6월과 8월에 집중해서 쏟아지는 보훈과 관련된 이야기. 냉방기구 없이 지하에서 사는 후손들만 찾아 인터뷰 하겠다고 소개를 원하는 방송국. 해방이후 반복적으로 문제제기 해왔으나 여전히 해결의지 없어 보이는 ‘광복군 3지대’ 의 반역의 역사.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결백함과 활동을 보증해주는 속칭 “인우보증”을 통해 신분세탁을 했다) 광복회의 폐쇄적 운영. 보훈처의 기계적 행정 등.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쩌면 ‘소총하나 들고 골짜기에서 백병전을 할 수밖에 없던’ 100년 전 그 계곡의 광복군보다 나라에 대한 , 혹은 내가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지키고 싶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생각된다. 루돌프 아르하임이 말한 “영화는 현실세계를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재구성을 한다 ”라는 말을 인용하면 우리가 보는 8월의 영화는 그저 8월을 위로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영화 속에서라도 역사를 기리기 위함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소위 말하는 8월의 ‘국뽕’ 영화의 관람을 마치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반복의 역사다. 이정도가 되면 학습개선의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농 섞인 혼잣말도 해본다. 100년 전 여름보다 지금 여름이 조금 더 덥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공기가 흐르지 않는다.

덧) 조수연(가명) 할머님의 외할아버지는 최진동 장군이다.

윤종훈 작가 neocross@view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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