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자의 작품 속 무기 이야기] 영화 ‘봉오동 전투’, 일제치하 36년에 대한 민족의 고통 그리고 157 대 1의 간극
[태기자의 작품 속 무기 이야기] 영화 ‘봉오동 전투’, 일제치하 36년에 대한 민족의 고통 그리고 157 대 1의 간극
  • 태상호 군사전문기자
  • 승인 2019.07.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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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물론 대중들조차 기다리던 영화 ‘봉오동 전투’가 8월 7일 개봉을 앞두고 언론 시사회를 개최했다. 또 영화 개봉에 앞서 여러 매체와 다큐멘터리에서도 봉오동 전투에 대한 재조명이 한창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가장 큰 의미는 잊혀 가는 독립투쟁사를 재조명함과 동시에 일제치하 36년의 민족 애환과 아픔을 120분여에 걸쳐 영화에 녹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 일본의 행태에 가슴이 답답했던 국민들은 이 영화를 통해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독립군의 무장 투쟁사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나간다. 그리고 주요 인물의 동선과 함께 자연스럽게 관람객들을 죽음의 계곡이라는 봉오동으로 이끌고 간다. 말 많았던 일본인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자연스러웠으며, 극중 인물의 특징을 잘 표현했다. 왜 개봉 전 영화 관계자들이 그들의 추후(追後)를 그토록 걱정했는지 영화를 보면서 이해가 갈 정도였다.

칼 액션

 

유해진, 주우진, 류준열 등 주요 배역들의 연기는 이름값을 했다. 영화 ‘용의자’를 감독했던 원신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만큼 볼거리가 많은 액션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액션은 모자라지 않고 오히려 넘칠 정도이며, 칼로 하는 몇몇 액션은 중국영화나 ‘존윅3’를 연상케 한다.

일부 배역들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점에 배치되지만 그 이유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특히 어린 일본군 포로 유키오 역을 했던 타이코 코타로와 여성 독립군 자현 역을 맡은 최유화는 등장은 이해가 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역할은 점점 의문을 가지게 한다. 유키오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가진 일본군 소년병으로 표현되며 영화 후반 부상을 입은 뒤 특별한 설명이 없이 사라진다. 자현은 류준렬의 누나의 지인으로 3.1 만세운동을 한 독립투사로 나오지만 극중에 개연성이 그다지 없는 와중에 카메라 조명을 계속 받는다.

영화 전반적인 총기와 의상에 대한 고증은 뛰어난 편이지만 그 역시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하지만 영화 여기저기서 적지 않은 ‘옥에 티’가 들어난다. 아직 일반 개봉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옥에 티’를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고편에 나온 장면을 위주로 짚어보자.

저격수
저격수

 

1. 저격수

당시 저격수는 역사 기록에 없다. 또한 본격적인 조준경을 이용한 저격수의 기록은 한일 양측 그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살’ 전지현 이후 저격수는 꾸준히 관련 콘텐츠에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에도 정밀사수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준경이 아닌 탄젠트식 가늠자를 이용해 원거리 사격을 했다. 따라서 영화에 나오는 양측의 저격수는 모두 옥에 티가 될 수 있다.

사진=위키백과
사진=위키백과

 

2. 산포

산악포라 일컬어지는 포는 봉오동 전투 당시에 이미 일본군에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월강추격대대가 소속된 19사단 편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화에서 불을 뿜었던 산포는 엄밀히 말해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사진=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3. 홍범도 장군의 마우져 권총

영화 말미에 홍범도 장군의 모습이 잠시 보인다. 홍범도 장군이 나온 알려진 사진 중에 하나는 그가 레닌에게 조선군 총사령관 칭호와 함께 받은 마우져 권총을 차고 행사 당일날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영화에선 그 사진 속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 마우져 권총을 수여 받은 것은 봉오동 전투가 끝난 지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다.

4. 지형과 기후

당시 봉오동의 지형은 영화에서 표현된 바와 약간 상이하다. 또한 기후 역시 같지 않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내린 비는 전투 후까지 내려 양측은 전장 정리를 못하고 후퇴한 상태였다.

157 대 1의 간극은 따로 언급해야겠다.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가장 주목하고 지금도 열띠게 연구하는바 중에 하나가 바로 양측 사상자의 상이함이다. 일본 측 기록은 봉오동 전투 중 전사자를 1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1921년 발행된 독립신문에 따르면 독립군이 기록하는 일본군의 사상자는 157명이다.

당시 봉오동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 월강추격대대 중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병력은 1개 중대와 약간의 지원 병력을 합친 208명 정도로 추정 되고 있다. 따라서 독립신문이 기록한 바를 따르면 살아 돌아간 일본군 병력은 51명이고, 일본군 기록에 의하면 살아 돌아간 일본군 병력은 207명이다.

봉오동 전투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양측의 피해를 기준으로 승패를 나누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전투는 사상자의 숫자가 아닌 전술/전략적인 목적을 달성 했는지에 따라 승패가 나뉜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당시 동북아 최고의 강군 중에 하나인 일본군(아무리 일본군 중에 19사단이 약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보급 지원을 받는 정규군)을 상대로 나라를 잃은 독립군들이 그들의 작전을 무의로 만든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승전이라는 표현을 쓸 자격이 있다.

157(독립신문) 대 1(일본 측 자료). 일본군 전사자 숫자의 간극은 관람객이 아닌 역사연구가들이 앞으로 치열한 연구를 통해서 밝힐 일이다.

 

태상호 군사전문기자 neocross@view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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