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훈의 히스토요리] 떡볶이는 표리부동하다
[윤종훈의 히스토요리] 떡볶이는 표리부동하다
  • 윤종훈 작가
  • 승인 2019.07.2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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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뷰어스 DB
사진=뷰어스 DB

 

정세를 분석하는 정치면과 경제면의 기사들은 연일 ‘대일 무역 적색경보’에서 오는 공포의 묘사에 전력을 쏟고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공포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그것에 대한 파해법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혹자는 극우성향의 선명성을 드러낸 일본정부의 맨얼굴이라는 분석을 하고, 또 다른 해석은 이미 호혜적 대우(white list) 를 받고 있던 한국경제가 미리 체질개선에 힘쓰지 않고 안일하게 대처해서 그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첫 단추를 잘못껴서 이렇게 된거 누구를 탓하겠는가?” 라는 자조 섞인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첫 단추는 아마도 ‘완벽한 친일청산’ 과 ‘대일배상청구권의 수모’를 의미하는 듯 하다. 어떠한 분석이 정답일지는 몰라도 ‘환경이 바뀌었다’라는 것 하나는 확실해졌다. 정치적인 해결을 위해 여야 지도부들은 연일 국민적 감정선에 맞는 메시지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고 반도체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경제 수장들은 대안 제시 및 관계 정리에 대한 뉴스를 생산하면서 차후 대책수립에 여념이 없다.

국민들은 어느 때보다 강한 반일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감정의 발현이다’라는 것을 전제로 소셜미디어는 뜨겁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기업(그들중 전범기업을 우선으로 하는)불매운동 리스트가 만들어지고 크게는 제 2의 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펼치고, 작게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예능인들의 국적 검증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모든 원인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결정을 무시하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연일 메시지가 거세게 이어지다 보니 쓴웃음이 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이랜드월드의 스파(SPA)브랜드 ‘스파오’가 준비한 ‘태권브이’와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스파오와 로보트 태권브이는 일본 및 글로벌 브랜드들이 장악하던 국내 시장에서 토종 콘텐츠로써 자존심을 지켜온 국가대표 브랜드들로 이번 협업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깊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의감이 앞서서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유효한 태권브이에 대한 향수였을까. 태권브이는 특정하지 않아도 일본의 로봇애니메이션에서 모티브를 따온 캐릭터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물론 당시 태권브이가 나타나서 보여준 꿈과 희망까지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적 적대감과 애국심을 마케팅 요소로 활용하려는 기업의 전략치고는 왠지 짧은 고민 속에서 나온듯한 느낌이다. 찾아보니 우리 것이 아니었던 것은 태권브이 하나가 아니다.

어릴 때 먹었던 많은 과자류들중 일본과 미국 것의 카피캣이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국적불명의 문화소비재들에게 추억을 빼앗기고 살아온 것을 지금 와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굳이 과자뿐이랴. 우리네 곁에서 추억으로 살아온 것들 중에는 자의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중 하나를 이야기 해보자. 간식과 주식 , 영양과 결핍 그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리를 못 잡고 있는 음식, 아니 한 접시. 떡볶이다.

떡볶이는 “못 먹어본 아이들”이 없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는 말 그대로 국민간식이다. 과거 학교 앞이나 시장어귀에서 좌판에 앉아 몇 개씩 집어먹던 길거리음식에서 지금은 오롯이 식탁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끼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물론 우리가 바로 떠올리는 떡볶이, 그 순정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긴 하다. 길에서 먹던 떡볶이는 이제 길을 대신 달려주는 배달원들의 도움으로 집에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떡볶이의 역사. 떡볶이도 음식이고 음식이라면 마땅히 기록에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과거 기록을 찾아보면 ‘궁중 떡볶이’라는 형태가 먼저 떠오른다. 떡을 길게 뽑거나 잘라서 간장양념으로 볶아서 상에 올리던 음식. 그러나 이 떡볶이는 귀하게도 ‘궁중’ 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으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떡볶이와는 계층이 다르다. 그래도 억지로 역사를 찾아 조상을 모셔온다면 궁중떡볶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많은 음식학자들이 이야기 한다. 이후 떡볶이의 역사가 언급되는 글이나 그림을 찾다보면 일제강점기 불리어졌던 노래 ‘오빠는 풍각쟁이’라는 유행가 한 소절 중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구”라는 구절에 떡볶이가 언급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의 떡볶이는 지금의 떡볶이의 이름보다는 불고기에 사리(고명)으로 넣어먹는 부재료로 보는 것이 더 맞다고 볼 수 있다. (맛칼럼리스트 황교익 선생님 강의 중 질문과 답에서 인용)

당시 이 유행가를 불렀던 박향림의 친일 이력에 대한 정서를 더한다면 떡볶이에 갑자기 친일의 향을 살짝 올릴 수도 있겠다. 잉여농산물 원조법으로 태어난 밀떡은 친미 행세를 해야 하는가.

이후 떡볶이의 역사는 잠시 대가 끊긴 가문의 족보처럼 한동안 기록이 없다. 이후의 역사는 1950년 이후 서울 신당동 마복림 할머니의 역사로 통일되었다. 대부분의 기사에서 혹은 떡볶이를 언급한 글들에서 “지금의 고추장 떡볶이의 원조는 마복림 할머니” 라는 단정적 서사를 인용한다. 이때의 표현들은 “마복림 할머니가 어떤 날 (어떤 기사는 탄생일도 있다) 신당동에 있던 중국집(중국인이 운영하던)에서 자장면을 드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다가 허리춤에 달고 계시던 가래떡이 자장면 그릇에 떨어져 이것을 먹어보니 맛이 좋더라 . 그래서 시장에서 떡볶이를 만들어 팔게 되었다”라는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배반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좀 더 농밀하게 다루어 볼 생각이다)

아무튼 전쟁이후 한국인들의 제 1교시는 ‘반공’이였고, 실제의 한국인들은 ‘허기에서 벗어나는 것’이였다. 이때 떡볶이의 역사가 같이 진행되었을 리 만무하다. 끼니를 때울 쌀이 부족한 시절 지금처럼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로 식량이 이용되었을 리가 없다. 전쟁이후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받게 된다. 처음 적용된 법은 ‘MSA 402조’였다. (원조액의 일정비율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

이 조항은 1961년까지 적용되어서 면, 인견사, 소맥, 대맥 등의 형태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원조는 잉여농산물 원조법 ‘PL480호’로 단일화 되었다. 세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70년 전후세대는 ‘혼분식장려운동’이라는 문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쌀이 부족하니 꼭 잡곡을 섞도록 캠페인을 강제하고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을 장려했다. 아마 역사와 전통이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칼국수나 여타의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들은 이때부터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밀떡이 쌀떡을 흉내 내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량 공정화는 이 시대 이후부터 활발해졌다. 식자재 공급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의 창립연도로 추정가능하다) 농담처럼 이야기 하면 “밀떡은 친미”라고 할 수 있겠다.

군사독재정권의 숙원사업 중 하나는 쌀의 자급자족이였다. 국토에 적합한 쌀의 품종을 찾는 것 (맛을 중시한) 보다는 그저 양이 많이 나오는 품종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통일벼’다 통일벼의 작명과 품종 선택에 ‘민족의 배고픔을 해결한 통치자 박정희 대통령’이 깊이 관여했다는 이야기는 비사가 아닌 쌀의 개발 역사다.(한양대 김태호 박사님 강의 중 일부)

이름은 쌀 모냥 보지 않고 그냥 통일벼라 불렸다. 배곯지 말라며 총칼로 헤베어진 땅에서 나락(벼)이 가득 열리니 정부미라는 이름도 나오고 배가 부르다 못해 일반미로 등급을 올렸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쌀이 남아 쌀로 만드는 음식들이 식탁에 등장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쌀떡은 친일이력이 있으신 대통령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니까 ‘친일’이라고 봐도 좋겠다.

가마보꼬가 원조인 오뎅, 아니 어묵은 조상이 일본이니 이럴 때 국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말고 가만히 있자. 부산 깡통시장 골목에서 생선 리어카에 실려 기름에 몸 담가 골목을 살리던 항구 오뎅이지만 조상이 일본이니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대동아 공영을 외치며 욱일기를 그려내던 그 윤전기. 그 아래에서 글자를 배우며 빈칸을 채우는 광화문의 신문사가 오늘은 ‘타도 일본’을 외치고 있다. 신문지로 만든 봉투에 들어가는 것을 질겁하여도 어쩔 수 없다. 그 신문지가 유일하게 자기역할을 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자.

종전선언일을 건국일로 외치자고 하는 정치인이 있다. 시장 어귀에서 먹지도 못하는 떡볶이 억지로 넘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딱하기 그지없다. 군사독재는 1980년대로 이어졌다. 반독재 외치던 청춘들의 사진은 흑백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매캐한 냄새를 헤치고 지금 살아남아 비곤한 삶속에서도 ‘처음처럼’ 살아가자고 한다. “매운맛이 생각나 매운 떡볶이 한 접시 놓고 세월처럼 푹 퍼진 떡볶이 씹으며 가만히 살아야 겠다”라고 말하며 아직은 웃음기를 털며 살고 있다. 그들만큼 뜨겁고 맵지 않지만 그래도 뭉근하게 끓고 있는 떡볶이도 대견하다. 같은 시절을 건너왔으니 말이다.

떡볶이는 음식이 아니라 한다. 몸에도 해롭다 한다. 엄청난 당분과 염분 그리고 탄수화물 덩어리 . 건강을 생각하면서 끼니를 조율하는 요즘시대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식탁의 적이다. 그러나 이 빨간, 그리고 속은 하얀 속살을 지니고 있는 표리부동한 길거리 음식. 계급도 낮고 앞으로도 길에서 팔리는 게 더 어울릴 음식이다. 멀쩡한 사기접시보다는 멜라민 그릇이라고 불리는 다소 해로운 재질의 접시가 어울리는 음식이다. 그렇다고 해도 떡볶이가 요즘 보이는 자들보다 해로울까 싶다. 선거 때만 시장에 나와 떡볶이 억지로 우겨넣는 그들보다 해로울까 싶다. 남의 나라에 주구가 되어 후손이 큰돈을 번이들도 있다. 이들 후손이 가지고 있는 섬에는 많은 이들이 구경값으로 돈을 또 벌게 해준다.

그 작은 섬 안에서도 떡볶이는 팔린다. 섬주인은 큰돈 벌려고 내 친우 친지 어찌되던 상관없이 혼도 팔고 이름도 팔았다. 떡볶이는 그런 곳에서도 소박하게 팔린다. 나중에 아비 어미가 되어 그이의 아이들에게 혹여나 해로운거 먹이지 않으려 땀흘려 일하지만, 그래도 떡볶이하나는 아비 어미가 좋아하던 그 골목으로 데려가서 먹인다.

서울 신당동, 대흥동, 통인시장, 지금도 남아있는 오래된 동네들 구석구석에 그곳이 있다. 그 옛날 기억에 남아있는 꺼져버린 연탄재 ,뿌연 먼지는 없어도 그때 할머니만 겨우 남아있는 떡볶이 집에서 아이에게 떡볶이 물에 씻겨서라도 한입 먹이면 그 시절을 입으로 넘겨주는 거 같아 든든하다. 오늘도 가짜로 불리고 표리부동한 음식으로 불린다. 그래도 떡볶이가 사람보다 낫다. 위정자들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위로한다. 매콤한 맛이 원래 우리민족의 맛은 아니지만 전쟁화약과 최루탄의 매콤함을 이겨낸걸 보면 우리한테 어울리는 맛인 듯하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떡볶이도 자기 할일 다했으니 남은 떡볶이는 늘어지고 졸아 들어도 된다. 충분히 할 일 다 했다.

 

윤종훈 작가 neocross@view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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