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누구의 손에 자랐을까
악마는 누구의 손에 자랐을까
  • 문서영 기자
  • 승인 2017.11.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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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반비)
(사진=반비)

[뷰어스=문서영 기자] 10대가 범죄를 저지르면 그 시선은 자연히 부모에게 쏠린다. “자식을 어떻게 키웠으면 자식이 저렇게 되냐”는 비난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는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자식의 범죄는 부모의 인생마저도 엉망이었을 것이라는 넝마를 덧입힌다.

국내를 넘어 일본에서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던 윤손하는 지난 6월 크나큰 사건과 맞닥뜨렸다. 아들로 인해 그는 스타에서 한순간에 학교 폭력 가해자의 부모가 됐다. 윤손하는 아들이 가담한 학교 폭력 사실이 보도되자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악의적 편집이 있었다면서 자신이 아는 사실을 설명하며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의 입장에선 해명이었지만 대중은 변명으로 여겼고 ‘가해자 부모로서 잘못된 행동’이라 지적했다. 결국 엄청난 비난에 직면한 윤손하는 “이번 일을 처리함에 있어 우리 가족의 억울함을 먼저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사죄드린다”는 입장을 다시 내놨다.

사건이 불거진 당시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방송에서 그가 했던 자식에 대한 말, 걱정, 애정 등을 인용했고 비교하며 윤손하와 아들의 관계에 주목했다. 사실 그에게 정말 억울한 부분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초기 대응의 실수와 더불어 아들로 빚어진 비난은 오롯이 그의 몫이어야 했다.

(사진=반비)
(사진=반비)

대중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소년법의 적용을 받는 10대의 행동의 책임은 부모가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식을 ‘그렇게’ 길러낸 부모에게 가장 큰 책임이 따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기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피해자 다음 순서로 꼽을 피해자가 가해자의 부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모르는 얼굴을 자식들은 많이 가지고 있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자신과 아이의 모습만 반추해봐도 가족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고분고분 말 잘 듣고 꼬박꼬박 학교를 잘 다니는 얼굴로 부모 앞에 섰을 가해자들도 있다. 물론 그것이 가해자 부모의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가해자 부모가 자기 자식의 이면에 가장 충격받은 또 한명의 피해자일 수 있다.

전세계를 뜨악하게 한 살인마의 엄마 역시 그렇다. 그는 자식의 이면을 몰랐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낸 수 클리볼드는 미국 총기난사사건의 가장 충격적 사건이라 불리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가해자 두 명 중 한명인 딜런의 어머니였다.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악마의 얼굴. 그러나 동시에 그 얼굴은 자신이 사랑으로 키워낸 아들의 것이기도 하다.

(사진=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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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클리볼드는 책을 통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변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가해자의 부모가 겪는 감정, 뒤늦은 후회에 대해 전하며 부디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주변인들에게까지 잘 자란 아들, 착한 아들로 평가받다 어느 순간 돌변해 학살자의 면모를 드러냈고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살해버린 아들.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된 그는 아들이 죽었다는 것, 그것이 자살이었다는 것, 많은 이들의 삶을 빼앗았다는 것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 클리볼드는 많은 이들을 죽인 가해자의 엄마가 느끼는 감정들을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도 극적이고 절절하게 전한다. 드라마틱하게 썼다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던 50대 초반의 여자가 인생을 통째로 들어내는 사건과 맞닥뜨리고 세상에 버티며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 것인지가 생살을 드러내듯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고통과 족쇄는 아들이 선사한 것이었지만 수 클리볼드는 오히려 그렇기에 자신의 아들이 어릴 때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함께 한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했던 것인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2년이 지나서야 수 클리볼드는 아들의 고통과 마주한다. 경찰에서 뒤늦게 아들의 쪽지와 일기를 전해준 탓도 있었지만 세상의 비난에 두 발로 딛고 서 있기도 힘들었기에 아들의 고통은 뒤늦게야 살펴볼 여력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아들의 우울증을 몰랐던 어머니의 회한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자신의 일상을 살아나가고 어머니를 위로하던 아들은 사실 온몸으로 자신의 위기를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건강, 집안의 재정문제에 신경 쓰느라 생전 처음 문제를 일으킨 아들이 “잘 해나가겠다”는 말을 믿고 넘긴다. 아들과 조금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우선순위의 걱정은 아니었다. 아들은 학살자가 되기 전날까지도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나가는 자식이었다. 그렇게 수 클리볼드는 실상은 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내면서도 부모가 알지 못하게 자신을 감추는 아이들도 있다고 지적한다. 아들의 아픔, 행적을 되짚으며 수 클리볼드는 세상 모든 흉악범죄의 가해자 부모가 무조건 자식의 문제를 알고도 방치한 방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선입견에 대한 변명은 아니다. 세상의 흉악범을 보며 자신마저 ‘어떻게 키웠길래’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로 부모가 아이의 전부를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다고, 그렇기에 아이의 작은 변화마저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가해자 부모로서 핑계가 아니라 아들의 사건을 계기로 뇌건강 분야 전문가로 거듭난 저자가 당부의 마음으로 쓴 책인 셈이다.

(사진=반비)
(사진=반비)

책은 너무 아프다. 자식이 있는 부모 독자라면 ‘내 아이가 이런 일을 벌였다면’이란 감정 이입 때문에 읽는 내내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남들에겐 최악의 악마로 불리지만 죽은 아들을 바로 만나러 가지도 못하는 상황의 수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끝없는 의문부호 속에서도 그저 아들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와 동시에 책을 읽으면서 분명 어떤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내 아이는 이 아이와 다를 것이라 확신하고 안심할 수 있는 허점을 찾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수 클리볼드는 차분히 말한다. 아이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자식을 아는 게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다만 아이를 잘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모든 일을 제쳐놓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집중의 시간이다.

다만 수 역시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아들의 마음과 뇌가 아팠고 그렇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듭된 해명의 흔적을 지우지는 못한다. 자식을 감싸주고 싶은 그 마음은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며 그의 아들 딜런과 함께 일을 벌인 에릭의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강조할 때 더욱 잘 드러난다. 가해자의 부모로서 자신의 찢어진 심정을 드러내면서 쓴 책이지만 어쩔 수 없게도 에릭을 방패삼아 아들을 두둔하는 엄마의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건 어쩌면 또다른 가해자 부모인 에릭의 부모를 상처입히는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결국 수 클리볼드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의 엄마라는 것이다. 수의 남편이었던 톰(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이 묘비명에 쓰겠다던 말이 가해자 부모의 아픔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제 끝이라니 감사합니다”
가볍게 읽을 수는 없는 책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서 키울 예정이거나 키워나가는 부모라면 한번쯤을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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